김대건 사제와 이민식 형제
이 형식
순교자 많은 천주교 집안 장남 김대건(안드레아)
잠자던 진리를 일찍 깨우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신앙
천주교인 고발 당할까 가족이 고향 솔뫼를 등지고 교우촌 용인 성애골로 피해들었다
신부가 없어 조부와 숙부가 성사도 못 받고 세상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
겨레의 영혼 구하는 사제 되라는 부르심에 신학생으로 떠난 마카오 유학
서해의 심한 풍파가 라파엘 호의 돛대는 부러뜨려도 그분의 용기는 꺾지 못하여
박해와 감시 속에서도 선교사들의 어려운 입국을 도왔다
수선탁덕, 조선인 최초 신부가 되어 1년여 사목과 조선출입로 개척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안타깝게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효수경중 (사형) 집행된다
“서양인과 교섭한 것은 천주교를 위해서고, 천주님을 위해서였으며,
그분을 위해 죽는 것- 죽은 뒤 행복하려면 천주교를 믿으라. 내 목을 치시오.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
의연한 표정과 자세로 흘리신 선혈, 우리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 소식을 듣고와 40일간을 지켜보다가 군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에,
백사장에 묻은 시신을 몰래 꺼내 효수된 머리는 가슴에 안고 시신을 결방하여 등에 짊어지는 이민석(빈첸시오)
17세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과 신심이 뛰어난 청년은
김 신부님이 은이 마을 사목할 때, 신부님의 어진 인품과 고결한 덕행에 감화되어
각별히 따르고 존경했다
강직하고 순박하며 수계범절에 열심인 그를 김 신부님도 칭찬하였다
사제가 되고 싶었던 그는 비록 뜻은 못 이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며 힘들다는 말없이 교회에 봉사하여 반 성인으로 불리웠다
한양에서 미리내까지 먼 길을 남의 눈에 안 띄게 인적없는 밤에만 숲길을 이용하여 운구하며 무덤까지 만들었다
우리는 은이 성지에서 아무 짐 없이 도보 순례하여도 힘들어서 신덕 ,망덕, 애덕 고개마다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해야만했는데......
김 신부님의 시신을 운구했을 이민식 형제의 온몸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 되었으리라
훗날 김 신부님의 그리운 어머니 우르슬라도, 사제 서품준 페레올 주교도 그곁에 묻어주고 평생 묘역을 돌보아 주었다.
땅을 기증하고 성지만드는데 공헌한 이민식도 92세에 신부님 곁에...
박해를 피해 숨어든 교인들 집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은하수 같다는 마을, 미리내
103위 순교성인들과 모든 순교자들이 비추는 빛으로 영원무궁히 빛나리라